중원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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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9-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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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되는 고구려비로 고구려의 남하경로도 확인할 수 있고,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effect(영향) 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히, 한강 유역 지배를 위한 삼국의 경쟁은 치열하였는데, 중원 고구려비는 천여 년이 훨씬 지나 갑자기 발견되어 당시 남한강 유역의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고구려 세력이 확장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이렇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 동맹하여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세력 확장을 위래 끊임없이 경쟁하기도 하였다. 1981년 3월 18일 국보 205호로 지정된 이 비는 크고 긴 화강암 기둥돌을 그대로 다듬어서 비면을 만들었는데, 비석의 높이는 144cm이고, 너비는 55cm, 두께는 37cm로 석비 자체의 형태가 광개토대왕비와 흡…(d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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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에 마주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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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더불어서 국원성이라는 사명도 같은 것이다, 들 원 자를 썼는데 원자는 내, 나, 양이라는 고구려에서 토사를 번역해 놓은 곳이기 때문에 국원성은 곧 국내성과 같은 등급의 성임을 가리키고 있다아 이것은 국원성 지역을 수도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아 국원성에 고구려는 비석을 세웠다.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줬다고 막연하게 알았는데 바로 고구려가 신라를 형제지국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대 국가들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뒤에는 척경비 또는 정계비를 세워 정복민들에 대한 회유와 더불어 자신들의 세력이 미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상례였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예로부터 마을입구에 비석이 서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입석 마을)에 있는 이 비석은 1979년 2월 충주 지방의 culture재 애호단체인 ‘예성동호회’에서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 팀에 의해 확인된 고구려시대의 비석이다. 상하, 상화, 화목이라는 것이 고구려 남진의 중요한 목표(goal)였던 것이다. 신라와 형제의 나라로 영원히 하늘의 뜻을 같이 받들고자 했던 고구려. 고구려 남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