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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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3-07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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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의 교육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몇 권의 저서와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따* 이는 율곡의 교육사상 전반을 포괄하는 내용이었다. 1564년(명종 19)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진출하여 명나라 서장관·청주목사·황해감사·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당쟁을 우려한 율곡이 대사간을 사직하려 할 때, 토정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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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 ~1584)는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철인이요, 경세가요, 또한 교육사상가이기도 하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원숙한 노학자였고, 율곡은 23세의 홍안의 선비였다. 그는 매일처럼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 봉은사에 들러 능엄경(稜嚴經) 등 불경에 접하게 됨으로써, 거기서 자신의 고뇌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율곡 이이(李珥)
[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1558년(명종 13)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이를 전후하여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재주가 높아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했다.
설명
1. 율곡의 생애와 저서 및 사상
[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 대학 report 제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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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 대학 레포트 제출자료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아명은 견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과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은 경륜으로 서로 교감(交感)하며 서로 인품을 깊이 흠모하는 사이였다. 강평공 명신(康平公 明晨)의 5대손으로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아버지 이 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율곡에게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충격을 준 것도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이었다. 22세(명종 12) 때 노씨를 부인으로 맞고, 그 이듬해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안동 도산 서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만에 돌아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하지만, 후일 그는 “마음은 유(儒)요 자취는 불(佛)이라”고 하여 선어(禪語)를 즐겨 읊고 불교의 현묘한 의미를 꿰뚫어 채득했다. 거기서 이틀간 묵으며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퇴계는 율곡에게 “후배가 두렵다”는 옛 말을 새삼 느낀다고 격려했다. 그리하여 3년상을 마친 19세 본, 즉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한 바 있따
다.